維歲次甲午九月戊午朔十九日乙丑孝00代孫OO
敢昭告于
顯十五代祖考 忠勤貞亮 扈聖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判 中樞府 事 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 事 諡 貞簡公 府君
歲序遷易 諱日復臨 追遠感時 不勝永慕 謹以 淸酌 庶羞 恭伸奠獻 尙
饗
퇴계 이황 축문
維歲次庚辰十二月戊午朔初八日乙丑孝十五代孫東恩
敢昭告于
顯十五代祖考崇政大夫判中樞府事兼知 經筵春秋館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諡文純公府君歲序遷易
諱日復臨追遠感時不勝永慕謹以淸酌庶羞恭伸奠獻 尙
饗
領事
조선시대 의정부·돈녕부·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중추부에 있던 정1품직.
각 아문의 서무를 총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원은 경연에 3명, 각 부서에 각 1명씩 두었다. 서반인 중추부에는 1명을 두었는데, 의정(議政)을 역임한 자에게 제수하는 대우직(待遇職)이었다. 1401년(태종 1) 국정최고 책임자인 의정부영사를 영의정부사로 불렀다가, 1466년(세조 12) 영의정으로 바꾸었다. 같은해 중추부를 두면서 그 전에 있던 중추원영원사(中樞院領院事)를 영사로 바꾸었는데, 영부사·영중추라고 부르기도 했다. 1414년(태종 12) 돈녕부를 처음 설치하면서 돈녕부영사를 두었는데, 왕비의 아버지로 처음 수직하는 자에게 제수했으며 대개 영돈녕으로 불렀다. 춘추관·관상감의 영사는 영의정이 겸임했으며, 홍문관과 예문관영사는 3정승 가운데 1명이 겸직했으나 대개 영의정이 겸임했다. 영사는 대개 영의정이 겸임하는 관직으로, 조선시대 중앙통치에 있어 권력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判中樞府事
조선시대 중추부의 종1품 관직.
정원은 2인이다.
조선시대의 중추부는 특정하게 관장하는 일 없이,
문무당상관으로서 소임이 없는 사람들을 대우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이 곳의 판사도 그들 고유의 담당업무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순장(巡將)으로서 행순(行巡 : 순찰)의 임무를 맡는다든가 관찰사나 병마절도사로 겸임되는 등 실질적인 기능을 가지기도 하였다.
중추부판사는 대신급의 고위관원이 체직될 때
잠시 임명되는 자리로 활용되었다.
領中樞府事
요약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두었던 정1품 관직.
정원은 1인이다. 중추부의 영사(領事), 즉 최고책임자로서 ‘영중추 또는 영부사’로 약칭되기도 하였다. 이는 1466년(세조 12) 종래의 중추원을 중추부로 개편하면서 처음 두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에 의한 관제개혁으로 폐지되었다.
고려시대의 중추원은 국가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핵심적 관부였으나, 조선시대의 중추부는 형식상 서반(西班)의 최고관부로 편제되어 있었을 뿐 일정한 소관사무가 없는 유명무실한 기구였다. 따라서, 영중추부사·판중추부사·지중추부사 등의 관직도 맡은 일이 없는 명목상의 직위에 지나지 않았다.
보통은 의정부나 육조의 고위직에서 물러난 문관들을 예우하여 계속 녹봉을 주기 위한 일종의 명예직으로 활용되었다. 영중추부사는 의정(議政)을 역임한 원로 대신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원이 1인뿐이었으므로, 의정 역임자가 많을 경우에는 서열에 따라 1인만 영중추부사에 임명하고 나머지는 모두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중추부에서는 직무가 없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비변사도제조(備邊司都提調)를 겸직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국가의 중요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1894년 이후에 신설된 중추원 의장은 영중추부사의 후신이라 할 수 있으나 고유의 소관사무가 있었으므로 그 성격이 달랐다.
조선시대 관직과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대광보국숭록대부 - 品階
의정부 - 司 -소속관청
영의정 - 職位
청풍할배
품계: 朝奉大夫 - 종4품
察訪 종6품 : 품계는 높으나 낮은 직위의 벼슬-行職
行 昭村道 察訪
通訓大夫 - 정3품 당하관
事
조선시대 의정부·돈녕부·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중추부에 있던 정1품직.
각 아문의 서무를 총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원은 경연에 3명, 각 부서에 각 1명씩 두었다. 서반인 중추부에는 1명을 두었는데, 의정(議政)을 역임한 자에게 제수하는 대우직(待遇職)이었다. 1401년(태종 1) 국정최고 책임자인 의정부영사를 영의정부사로 불렀다가, 1466년(세조 12) 영의정으로 바꾸었다. 같은해 중추부를 두면서 그 전에 있던 중추원영원사(中樞院領院事)를 영사로 바꾸었는데, 영부사·영중추라고 부르기도 했다. 1414년(태종 12) 돈녕부를 처음 설치하면서 돈녕부영사를 두었는데, 왕비의 아버지로 처음 수직하는 자에게 제수했으며 대개 영돈녕으로 불렀다. 춘추관·관상감의 영사는 영의정이 겸임했으며, 홍문관과 예문관영사는 3정승 가운데 1명이 겸직했으나 대개 영의정이 겸임했다. 영사는 대개 영의정이 겸임하는 관직으로, 조선시대 중앙통치에 있어 권력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判中樞府事
조선시대 중추부의 종1품 관직.
정원은 2인이다.
조선시대의 중추부는 특정하게 관장하는 일 없이,
문무당상관으로서 소임이 없는 사람들을 대우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이 곳의 판사도 그들 고유의 담당업무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순장(巡將)으로서 행순(行巡 : 순찰)의 임무를 맡는다든가 관찰사나 병마절도사로 겸임되는 등 실질적인 기능을 가지기도 하였다.
중추부판사는 대신급의 고위관원이 체직될 때
잠시 임명되는 자리로 활용되었다.
領中樞府事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두었던 정1품 관직.
정원은 1인이다. 중추부의 영사(領事), 즉 최고책임자로서 ‘영중추 또는 영부사’로 약칭되기도 하였다. 이는 1466년(세조 12) 종래의 중추원을 중추부로 개편하면서 처음 두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에 의한 관제개혁으로 폐지되었다.
보통은 의정부나 육조의 고위직에서 물러난 문관들을 예우하여 계속 녹봉을 주기 위한 일종의 명예직으로 활용되었다. 영중추부사는 의정(議政)을 역임한 원로 대신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원이 1인뿐이었으므로, 의정 역임자가 많을 경우에는 서열에 따라 1인만 영중추부사에 임명하고 나머지는 모두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중추부에서는 직무가 없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비변사도제조(備邊司都提調)를 겸직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국가의 중요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1894년 이후에 신설된 중추원 의장은 영중추부사의 후신이라 할 수 있으나 고유의 소관사무가 있었으므로 그 성격이 달랐다.
左 議 政
정원은 1인이다. 좌상(左相)·좌정승(左政丞)·좌규(左揆)·좌합(左閤)·좌대(左臺) 등으로도 불린다.
좌의정은 대개 우의정을 역임한 원로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영의정·우의정과 함께 삼공(三公)으로서 국왕을 보좌하면서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본직 이외에 문소전(文昭殿)·인수부(仁壽府)·사재감(司宰監)·승문원(承文院) 및 비변사의 도제조(都提調)와 영경연사(領經筵事)·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당연직으로 겸임하였다. 그리고 홍문관·예문관의 영사와 세자시강원부(世子侍講院傅), 도화원(圖畫院)의 도제조, 일시적·집중적인 사업을 위한 각종 도감(都監)·소(所)·색(色)·청(廳) 등의 도제조와 명사(明使)·청사(淸使)의 영접사 및 도체찰사(都體察使) 등을 수시로 겸임하였다.
領 議 政
영의정(領議政)은 의정부 3정승 가운데 하나로 정1품에 해당하는 조선 시대 최고의 중앙관직이었다. 영상(領相), 수상(首相), 상상(上相), 영규(領揆)라고도 한다. 대개 좌의정을 역임한 원로대신을 임명했으며, 좌의정·우의정과 함께 삼공(三公) 또는 삼정승(三政丞 議政)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품계는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이며, 정원은 1명이었다.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領事), 승문원 도제조(都提調), 세자시강원 세자사(世子師)를 겸임했다.
75세 경자년 2월에 좌의정에 승차되었다.(1600년)
판중추부사에 채직되어 부처되었다.
76세 신축년 호종공신 일품의 녹봉을 부치다.(1601년)
78세 계묘년 영중추부사에 승차되었다.(1603년)
79세 갑진년 호종훈3등으로 책록되었다.(1604년)
7월 충근정량호성공신의 호가 하사되었다.
9월 서원부원군이 되었다.
충훈부에서 화사를 보내어 초상을 그리게 했다.
80세 을사년 9월19일 예천 고평리에서 운명하시다.(1605년)
광해군 5년 위성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폐위후삭탈(161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613년)
인조13년 정간의 시호가 내려지다.(1635년)
藥圃先祖 不遷位 祝文
維歲次00九月00朔十九日00孝00代孫00
敢昭告于
顯00代祖考 忠勤貞亮 扈聖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判中樞府事 兼 領經筵事 監春秋館事 贈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領中樞府事 兼 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傅 西原府院君 諡 貞簡公府君 歲序遷易 諱日復臨 追遠感時 不勝永慕 謹以 淸酌庶羞 恭伸奠獻 尙
饗
좌의정의 겸직-판중추부사,경연영사,춘추관감사
영의정의 겸직-경연영사,홍문관영사,예문관영사,
춘추관영사,관상감영사,세자부
조선시대 관직과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대광보국숭록대부 - 品階, 의정부 - 司 -소속관청, 영의정 - 職位
청풍할배
품계: 朝奉大夫 - 종4품 通訓大夫 - 정3품 당하관
察訪 종6품 : 품계는 높으나 낮은 직위의 벼슬-行職
行 昭村道 察訪
세자사 [世子師]
발음 : [세:--]
형태분석 : [世子師]
(1) [역사] 고려 시대, 1277(충렬왕 3)년에 두었던 벼슬. 왕세자의 스승이다.
(2) 조선 시대, 세자시강원의 정일품 벼슬. 세자의 스승으로, 영의정이 겸임하였다
세자부1 [世子傅]
발음 : [세:--]
형태분석 : [世子傅]
(1) [역사] 고려 시대, 세자첨사부(世子詹事府)의 으뜸 벼슬. 세자나 세손의 교육을 맡아보았다. 1277(충렬왕 3)년에 태자태부(太子太傅)를 고친 것으로, 세자사(世子師)의 다음이다.
약어 부 12 (傅) (1)
(2) 조선 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일품(正一品) 벼슬. 세자의 스승으로, 세자의 교육을 맡아보았으며 좌우의정이 겸임하였다.
약어 부 12 (傅) (2)
(3)조선시대에 들어 1466년(세조 12) 이전에 세자시강원의 정1품 관직으로 부활되어 좌의정·우의정 가운데 한 사람이 겸직하였다.
시강원
태조 초기의 세자관속(世子官屬)을 개칭한 이름이다. 관원으로는 영의정이 겸임하는 사(師:정1품) 1명, 부(傅:정1품) 1명, 이사(貳師:종1품) 1명, 좌·우빈객(左右賓客:정2품) 각 1명, 좌·우부빈객(左右副賓客:종2품) 각 1명은 타관직(他官職)이 겸임하고, 찬선(贊善:정3품)·보덕(輔德:정3품)·겸보덕(兼輔德:정3품)·진선(進善:정4품)·필선(弼善:정4품)·겸필선(兼弼善:정4품)·문학(文學:정5품)·겸문학(兼文學:정5품)·사서(司書:정6품)·겸사서(兼司書:정6품)·설서(說書:정7품)·겸설서(兼說書:정7품)·자의(諮議:정7품) 각 1명을 두었는데 1889년(고종 26)에는 전서관(典書官)·장서관(掌書官) 각 1명을 더 두었으며, 이속(吏屬)으로는 서리(書吏) 17명, 서사(書寫) 2명, 장책(粧冊) 1명, 사령(辭令) 15명, 수공(水工) 1명, 군사(軍使) 4명을 증원하였다.
衛聖功臣 敎旨 原文
敎
忠勤貞亮 扈聖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兼 領 經筵事 監春秋官事 西原府院君 致仕 贈 竭忠盡誠 同德贊謨 佐運 衛聖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 事 世子師 西原府院君 鄭琢 書
藥圃先祖 不遷位 祝文
維歲次00九月00朔十九日00孝00代孫00
敢昭告于
顯00代祖考 忠勤貞亮 扈聖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判中樞府事 兼 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 事
諡 貞簡公府君 歲序遷易 諱日復臨 追遠感時 不勝永慕 謹以 淸酌庶羞 恭伸奠獻 尙
饗
퇴계 이황 축문
維歲次庚辰十二月戊午朔初八日乙丑孝十五代孫東恩
敢昭告于
顯十五代祖考崇政大夫判中樞府事 兼 知經筵春秋館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諡文純公府君 歲序遷易
諱日復臨 追遠感時 不勝永慕 謹以 淸酌庶羞 恭伸奠獻 尙
饗
서애 류성룡 축문
維歲次庚辰五月辛卯朔初六日丙申 孝玄孫寧夏 敢昭告于 顯先祖考輸忠翼謨光國 忠勤貞亮 効節協策 扈聖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 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豊原府院君 贈 諡 文忠公府君 歲序遷易 諱日復臨 追遠感時 不勝永慕 謹以 淸酌庶羞 祗薦歲事 尙 饗
領事
조선시대 의정부·돈녕부·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중추부에 있던 정1품직.
각 아문의 서무를 총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원은 경연에 3명, 각 부서에 각 1명씩 두었다. 서반인 중추부에는 1명을 두었는데, 의정(議政)을 역임한 자에게 제수하는 대우직(待遇職)이었다. 1401년(태종 1) 국정최고 책임자인 의정부영사를 영의정부사로 불렀다가, 1466년(세조 12) 영의정으로 바꾸었다. 같은해 중추부를 두면서 그 전에 있던 중추원영원사(中樞院領院事)를 영사로 바꾸었는데, 영부사·영중추라고 부르기도 했다. 1414년(태종 12) 돈녕부를 처음 설치하면서 돈녕부영사를 두었는데, 왕비의 아버지로 처음 수직하는 자에게 제수했으며 대개 영돈녕으로 불렀다. 춘추관·관상감의 영사는 영의정이 겸임했으며, 홍문관과 예문관영사는 3정승 가운데 1명이 겸직했으나 대개 영의정이 겸임했다. 영사는 대개 영의정이 겸임하는 관직으로, 조선시대 중앙통치에 있어 권력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判中樞府事
조선시대 중추부의 종1품 관직.
정원은 2인이다.
조선시대의 중추부는 특정하게 관장하는 일 없이,
문무당상관으로서 소임이 없는 사람들을 대우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이 곳의 판사도 그들 고유의 담당업무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순장(巡將)으로서 행순(行巡 : 순찰)의 임무를 맡는다든가 관찰사나 병마절도사로 겸임되는 등 실질적인 기능을 가지기도 하였다.
중추부판사는 대신급의 고위관원이 체직될 때
잠시 임명되는 자리로 활용되었다.
領中樞府事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두었던 정1품 관직.
정원은 1인이다. 중추부의 영사(領事), 즉 최고책임자로서 ‘영중추 또는 영부사’로 약칭되기도 하였다. 이는 1466년(세조 12) 종래의 중추원을 중추부로 개편하면서 처음 두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에 의한 관제개혁으로 폐지되었다.
보통은 의정부나 육조의 고위직에서 물러난 문관들을 예우하여 계속 녹봉을 주기 위한 일종의 명예직으로 활용되었다. 영중추부사는 의정(議政)을 역임한 원로 대신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원이 1인뿐이었으므로, 의정 역임자가 많을 경우에는 서열에 따라 1인만 영중추부사에 임명하고 나머지는 모두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중추부에서는 직무가 없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비변사도제조(備邊司都提調)를 겸직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국가의 중요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1894년 이후에 신설된 중추원 의장은 영중추부사의 후신이라 할 수 있으나 고유의 소관사무가 있었으므로 그 성격이 달랐다.
左 議 政
정원은 1인이다. 좌상(左相)·좌정승(左政丞)·좌규(左揆)·좌합(左閤)·좌대(左臺) 등으로도 불린다.
좌의정은 대개 우의정을 역임한 원로대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영의정·우의정과 함께 삼공(三公)으로서 국왕을 보좌하면서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감독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본직 이외에 문소전(文昭殿)·인수부(仁壽府)·사재감(司宰監)·승문원(承文院) 및 비변사의 도제조(都提調)와 영경연사(領經筵事)·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당연직으로 겸임하였다. 그리고 홍문관·예문관의 영사와 세자시강원부(世子侍講院傅), 도화원(圖畫院)의 도제조, 일시적·집중적인 사업을 위한 각종 도감(都監)·소(所)·색(色)·청(廳) 등의 도제조와 명사(明使)·청사(淸使)의 영접사 및 도체찰사(都體察使) 등을 수시로 겸임하였다.
領 議 政
영의정(領議政)은 의정부 3정승 가운데 하나로 정1품에 해당하는 조선 시대 최고의 중앙관직이었다. 영상(領相), 수상(首相), 상상(上相), 영규(領揆)라고도 한다. 대개 좌의정을 역임한 원로대신을 임명했으며, 좌의정·우의정과 함께 삼공(三公) 또는 삼정승(三政丞 議政)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품계는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이며, 정원은 1명이었다.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領事), 승문원 도제조(都提調), 세자시강원 세자사(世子師)를 겸임했다.
75세 경자년 2월에 좌의정에 승차되었다.(1600년)
판중추부사에 채직되어 부처되었다.
76세 신축년 호종공신 일품의 녹봉을 부치다.(1601년)
78세 계묘년 영중추부사에 승차되었다.(1603년)
79세 갑진년 호종훈3등으로 책록되었다.(1604년)
7월 충근정량호성공신의 호가 하사되었다.
9월 서원부원군이 되었다.
충훈부에서 화사를 보내어 초상을 그리게 했다.
80세 을사년 9월19일 예천 고평리에서 운명하시다.(1605년)
광해군 5년 위성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폐위후삭탈(161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613년)
인조13년 정간의 시호가 내려지다.(1635년)
藥圃先祖 不遷位 祝文
維歲次00九月00朔十九日00孝00代孫00
敢昭告于
顯00代祖考 忠勤貞亮 扈聖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領中樞府事 兼 領經筵事 監春秋館事 贈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 領議政 領中樞府事 兼 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傅 西原府院君 諡 貞簡公府君 歲序遷易 諱日復臨 追遠感時 不勝永慕 謹以 淸酌庶羞 恭伸奠獻 尙
饗
좌의정의 겸직-판중추부사,경연영사,춘추관감사
영의정의 겸직-경연영사,홍문관영사,예문관영사,
춘추관영사,관상감영사,세자부
조선시대 관직과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대광보국숭록대부 - 品階, 의정부 - 司 -소속관청, 영의정 - 職位
청풍할배
품계: 朝奉大夫 - 종4품 通訓大夫 - 정3품 당하관
察訪 종6품 : 품계는 높으나 낮은 직위의 벼슬-行職
行 昭村道 察訪
세자사 [世子師]
(1) [역사] 고려 시대, 1277(충렬왕 3)년에 두었던 벼슬. 왕세자의 스승이다.
(2)조선 시대, 세자시강원의 정일품 벼슬. 세자의 스승으로, 영의정이 겸임하였다
세자부1 [世子傅]
(1)[역사] 고려 시대, 세자첨사부(世子詹事府)의 으뜸 벼슬. 세자나 세손의 교육을 맡아보았다. 1277(충렬왕 3)년에 태자태부(太子太傅)를 고친 것으로, 세자사(世子師)의 다음이다.
(2)조선 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일품(正一品) 벼슬. 세자의 스승으로, 세자의 교육을 맡아보았으며 좌우의정이 겸임하였다.
(3)조선시대에 들어 1466년(세조 12) 이전에 세자시강원의 정1품 관직으로 부활되어 좌의정이 겸직하였다.
시강원
태조 초기의 세자관속(世子官屬)을 개칭한 이름이다. 관원으로는 영의정이 겸임하는 사(師:정1품) 1명, 부(傅:정1품) 1명, 이사(貳師:종1품) 1명, 좌·우빈객(左右賓客:정2품) 각 1명, 좌·우부빈객(左右副賓客:종2품) 각 1명은 타관직(他官職)이 겸임하고, 찬선(贊善:정3품)·보덕(輔德:정3품)·겸보덕(兼輔德:정3품)·진선(進善:정4품)·필선(弼善:정4품)·겸필선(兼弼善:정4품)·문학(文學:정5품)·겸문학(兼文學:정5품)·사서(司書:정6품)·겸사서(兼司書:정6품)·설서(說書:정7품)·겸설서(兼說書:정7품)·자의(諮議:정7품) 각 1명을 두었는데 1889년(고종 26)에는 전서관(典書官)·장서관(掌書官) 각 1명을 더 두었으며, 이속(吏屬)으로는 서리(書吏) 17명, 서사(書寫) 2명, 장책(粧冊) 1명, 사령(辭令) 15명, 수공(水工) 1명, 군사(軍使) 4명을 증원하였다.
衛聖功臣 敎書 原文
敎
忠勤貞亮 扈聖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兼 領經筵事 監春秋官事 西原府院君 致仕 贈 竭忠盡誠 同德贊謨 佐運 衛聖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 事 世子師 西原府院君 鄭琢
書
藥圃先祖 墓祀 祝文
維歲次00九月00朔十九日00孝00代孫00
敢昭告于
顯00代祖考 忠勤貞亮 扈聖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領中樞府事 贈 領議政 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西原府院君 諡 貞簡公府君 氣序流易 霜露旣降
瞻掃封塋 不勝感慕 謹以 淸酌序羞 祗薦歲事 尙
饗
藥圃先祖 不遷位 祝文
維歲次00九月00朔十九日00孝00代孫00
敢昭告于
顯00代祖考 忠勤貞亮 扈聖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領中樞府事 兼 領經筵事 監春秋館事 贈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領中樞府事 兼 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西原府院君 諡 貞簡公府君 歲序遷易 諱日復臨 追遠感時 不勝永慕 謹以 淸酌庶羞 恭伸奠獻 尙
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