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20. 16:53 http://cafe.daum.net/CHEONGJU/5bog/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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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목(鄭允穆) 1571(선조 4)~1629(인조 7)
조선의 학자.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淸風子)·죽창거사(竹窓居士), 좌의정 탁(琢)의 아들.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의 문인. 천성이 총명하여 경사(經史)에 통달, 당시의 학자들을 감탄케 했으며,
예악(禮樂)·병형(兵刑)·음양(陰陽)·율력(律曆)에 이르기까지 정통,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했다.
글씨에도 뛰어나 그의 초서(草書)는 당시의 제 일인자로 알려졌다. 1616년(광해군 8) 비로소
소촌도 찰방(召村道察訪)으로 나갔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에 불만을 품고 사직, 시(詩)·서(書)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정윤목(1671-1629)은 예천읍 고평리 불우실 마을 출신으로,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淸風子),
본관은 청주, 탁(琢)의 셋째 아들, 류성룡과 정구의 제자이다. 풍채가 호탕하여 보는 사람마다
맑은 바람처럼 시원하다고 하였다.
매우 총명하여 경서와 역사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뛰어난 문장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이 모두 탄복했다. 학문이 예절, 음악, 병법, 형법, 음양, 달력, 제자백가 등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성리학에도 깊은 연구가 있었다.
또한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초서에는 당시의 제1인자였다.
임진왜란(1592) 때 아버지를 따라 세자(光海君)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난할 때
세자와 함께 먹고 자면서 매우 친하게 지냈다. 임란 후에는 고평리 불우실을
거쳐 예천군 서쪽 해압산(海鴨山) 아래 노곡(蘆谷)에 살았다. 이 때 광해군이
왕이 되자(1609), 정윤목은 여러 차례 벼슬로 불리어졌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용궁면 월오리의 장야평(長野坪, 1614)으로 옮겼다.
이 때 광해군의 부름에 마지못해 소촌도 찰방(1616)으로 나아갔으나,
임금의 혼란한 정치에 실망을 느껴 1년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장야평으로 돌아왔다.
그 후 몽촌(夢村)으로 옮겼다가 풍양면 삼강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와 글씨로 여생을 보냈다.
용궁면 무이리의 무이서당(武夷書堂)에서 기록한 원고가 남아있고,
삼강리의 삼강강당(三江講堂)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북경에 갔을 때(1589)
그 곳 수양사(首陽祠, 백이.숙제 사당)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큰 글씨를 모사해 와서 현판에 게시하였는데,
이 현판은 지금도 남아있다. 또 스승 정구의 특별한 부탁으로 쓴 병풍 글씨가 남아있고,
호명면 황지리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다.
寒岡 鄭逑와 西厓 柳成龍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詩와 草書에 뛰어났다.
저자의 시문은 병화로 유실되고 약간 권만 家藏되어 왔다. 1759년 英祖가 저자의 부친 鄭琢의 문집인 「藥圃集」을 간행하라며 저자의 현손 鄭玉(1694~1760)을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玉은 1760년 「약포집」을 간행할 때, 저자의 현손 鄭峚이 家藏草稿를 바탕으로 수집한 稿本을 가져왔다. 이에 「약포집」을 간행한 뒤에 고본을 교정 편차하여 상하 2책으로 만들어 李廷彬이 繕寫하고, 저자가 그의 조부 鄭以忠의 詩를 쓴 遺墨 몇 장을 첨부하여 1760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原集》 이 본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만송D1-A1909), 국사편찬위원회(D3B-442)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속집이 합부되어 있다.
원집을 간행할 때 급하게 간행하느라 유문을 다 싣지 못하여 重刊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다. 6대손 鄭必奎와 宗孫 鄭昌運이 가장되어 있는 유고를 살피고 친지 집에 남아 있던 遺籍을 구하여 續集을 엮었는데, 草本의 정리를 다 마치기 전 정창운이 졸하였다. 그 후 정필규가 族姪 鄭光顯과 함께 거듭 繕修하고 老成人의 교감을 거친 다음 원집의 編例에 따라 부록 문자와 다른 이들이 지어 준 시를 붙여 1825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續集》 이 본은 규장각(古3428-331),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장서각(D3B-2036),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64년 후손 鄭載元, 鄭載頀가 目錄이나 본문 중 유실된 부분을 석판으로 보충하여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표지를 「淸風子先祖文集」이라 하였다. 이 본은 국립중앙도서관(우촌古3644- 88)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