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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벨 리

정윤덕 2018. 2. 28. 20:16
< 에드가 앨런 포의 아내 >

어려서 들은 괴담 중에 이런 게 있었어. 두 친구가 있었는데 돈과 여자 때문에 의리를 상하고 한 친구는 다른 친구를 살해할 계획을 세워. 살인을 저지른 다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역시 시체 처리겠지. 공사판 노동자였던 친구는 완전범죄를 위한 시체 은닉 장소를 알고 있었어. 새로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다지던 땅 밑에 묻고 그 위에 집을 올려 버린 거야. 그런데 그 집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노이로제에 걸린다.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땅 밑에서 찌르르 찌르르 소리가 들리는 거야. 몇 달을 두고 계속되기에 땅을 파 봤더니 시체가 나왔고 귀뚜라미 소리는 다름 아닌 시체의 손목에 둘러져 있던 손목시계 알람 소리였어. 범인은 체포된다. 

이 괴담을 들으면서 나는 그 즈음 읽었던 한 소설을 떠올린 기억이 나.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였지. 내용이 비슷하잖아. 격렬한 증오에 사로잡혀 고양이를 죽이려다 이를 말리는 애꿎은 아내의 머리에 도끼를 찍었던 남자. 그 시신을 숨기기 위해 지하실 벽을 들어내고 그 안에 시신을 넣은 후 석회로 발라 버리지. 아내를 처리하고 고양이를 죽이려 하지만 이미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양이는 사라진 뒤였어. 경찰이 방문하고 집안을 뒤졌지만 수포로 돌아간 후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열기에 사로잡혀 지하실 벽을 두드리면서 부르짖지. “이거 정말 튼튼하게 만들어지 않았어요?” 그때 벽 안에서 들려온 고양이 소리. 야옹. 야옹. 아내의 썩어가는 시체 위에는 검은 고양이가 앉아 있었고. 아 무서웠지. 

나는 영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이 소설가이자 시인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을 유감스럽게도 딱 세 가지만 읽었다. (미안하다 무식하다) <검은 고양이>와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 <어셔 가의 몰락> . <검은 고양이>도 그랬지만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도 한동안 가녀린 어린이의 꿈에 시커먼 오랑우탄이 며칠 동안 등장하게 만들 만큼 무서운 소설이었지. 선원이 데리고 온 오랑우탄이 주인이 면도하는 모습을 보고 흉내내다가 일가족의 목을 죄다 잘라 버린 끔찍한 이야기지만 당시의 많은 청소년들처럼 냉철한 머리로 그 사건을 해결해 가는 최초의 ‘탐정’이라 할 오거스트 뒤팽에 매료됐었지. <어셔가의 몰락>도 며칠 무섭게 했었고.

에드가 앨런 포의 깊고도 넓은 문학 세계라는 그릇 (사실 내가 본 건 그의 진면목이 아니라 하더군)에서 튄 국물 세 방울을 핥아먹고 뭐 그에 대해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겠지만 염치불구하고 그의 얘기를 좀 해 볼까 해.

일찌감치 고아가 돼 버리고 수양부모 밑에서 자랐으니 그의 팔자가 고울 리 없었지만 그의 초반운은 일종의 롤러코스트였지. 부유하고 어진 수양부모 밑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모범적인 학교 생활을 하진 못했고 사랑의 아픔과 도박과 술의 유혹을 겪으면서 대학 졸업장이 물거품이 됐어. 군에 입대해서는 타고난 명민함을 발휘하여 일반병으로서는 최고 계급인 특무상사까지 올라갔다가 정작 수양아버지의 주선으로 육군사관학교에 갔지만 이 자유로운 예술혼은 사관학교의 규율을 견디기 어려웠지. 

수양어머니가 죽고 수양아버지가 재혼한 뒤 수양부모 가족과 연이 끊긴 에드가 앨런 포를 평생 괴롭힌 거 가난이었어. 마치 <검은 고양이>에서 그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붙고 증오의 대상이 되고 결국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교수대에 올린 ‘검은 고양이’와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엄청난 폭음을 일삼게 됐지. <검은 고양이>에서 나오는 주인공에 대한 묘사는 어쩌면 그 자신을 묘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털어놓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술을 폭음하는 버릇 때문에 나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나날이 변덕이 심해져 화를 잘 내고 다른 사람의 기분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게 되었다.” 

수양아버지가 재혼한 이후 거의 의절하게 되면서 포는 유일한 혈육이라 할 고모 클램 부인과 함께 살게 돼. 아마도 가족의 따뜻함을 느끼며 살았던 건 오랜만의 일일 텐데 그 집에서 에드가 앨런 포는 좀 기이한 사랑과 조우하게 돼. 바로 고종사촌동생인 버지니아 클램이었지. 당시 그녀 나이 열 네 살. 에드가 앨런 포의 나이 스물 일곱. 나이 차이도 차이일뿐더러 소녀티를 벗기는커녕 어린 아이 티를 막 벗은 소녀와 에드가는 사랑에 빠지게 된 거야. 

그래서 포가 소아성애자라는 주장도 있지. 하지만 그보다는 에드가 앨런 포카 커버(?)하는 연령대가 넓었다고 생각하는 게 나을 거야. 한때 그는 친구의 어머니를 사모해서 명시를 남긴 바도 있거든. 위로 10년 아래로 무한대 뭐 그런 거였을까. 그 시대에도 심한 도둑놈으로 몰릴 분위기였는지 그는 아내의 나이를 스물 한 살로 고쳐서 혼인신고를 했어. 

하지만 창백한 문학소녀 버지니아는 언제나 취해 있는 남편을 무척 사랑했고 에드가 앨런 포도 그 아내를 매우 아꼈다고 해. 그런데 어느 날 피아노를 치며 새된 소리로 노래하던 버지니아는 피를 토한다. 결핵이었어. 에드가 앨런 포는 발버둥을 쳤지만 형편이 나아질 일이 별로 없었어. 대통령의 아들을 만나 한 자리 부탁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 말할 것도 없이 술 때문이었지. 절망 속에 폭음을 했고 절망은 폭음 속에 깊어졌다. 

당시 포의 집을 방문했던 손님에 따르면 버지니아는 고양이를 껴안고 이불을 덮고 누워서 자고 있고 곁에는 포우의 장모가 각각 버니지아의 차거운 손을 잡아 주며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고 난로를 땔 돈이 없어 원고지를 연료삼아 불을 지펴야 했다는군. 

그녀가 결국 스물 다섯의 나이로 죽었을 때 그녀의 시신을 덮은 건 포의 낡은 외투였고 그 곁에는 기르던 고양이만 앉아 있었다고 하지. 에드가 앨런 포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나 봐. 무덤가를 배회하며 통곡하기도 여러 번이었고 그녀를 두고 불후의 명시라 할 애너벨 리를 남기게 되니까. 예술가들에게는 별로 반갑지 않은 얘기가 되겠지만 예술은 절박함 속에서 더 깊게 영그는 게 아닌가 해.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빚을 갚기 위해 쫓기듯 글을 썼고 모차르트도 비슷한 빚더미 속에서 콩나물들과 씨름했듯이 말이야. 어쩌면 나이 어리고 결핵에 걸린 아내, 하지만 가난 속에서도 남편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찬 손을 잡아주는 손에 감사하며 고양이를 쓰다듬던 버지니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에드가 앨런 포의 예술혼의 원천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 읽게 된 <애너벨 리>를 보면 더욱. 

 아주 오랜 그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알지도 모를 한 소녀가 살았네
 그녀의 이름은 애너벨 리
 나를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일밖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는 살았네

 바닷가 그 왕국에선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지만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했었네
 천상의 날개 달린 천사마저도
 그녀와 나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그것이 이유였었네, 오랜 옛날
 바닷가 이 왕국에선
 구름에서 불어온 바람이
 내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만들었네
 그래서 그녀의 명문 친척들은
 내게서 그녀를 앗아 갔네
 바닷가 왕국
 무덤 속에 가두기 위해

 천상에서도 우리의 반만큼도 행복하지 못했던
 천사들이 그녀와 날 시기했던 탓
 그래 그것이 이유였네
(바닷가 그 왕국 사람이 모두 알 듯)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싸늘하게 하고
 나의 애너벨 리를 숨지게 한 것은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훨씬 강한 것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그래서 천상의 천사들도
 바다 밑 악마들도
 내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에서
 떼어버리지 못했네

 달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그래서 나는 밤이 지새도록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
 파도소리 들리는 그녀의 무덤에서

아내가 죽은 뒤 그는 다른 여성들과 사귀었지만 술에 찌든 모습 때문에 거절당해. 이제는 과부가 된 옛사랑을 만나고 그녀에게서 술을 끊는다면 결혼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지만 그녀와의 결혼을 준비하던 중 그야말로 의문의 죽음을 맞지. 광란에 빠진 모습으로 ‘레이놀즈’라는 이름을 부르짖다가 “불쌍한 영혼을 거두어 주소서”를 유언으로 남긴 뒤 죽었으니까. 1849년 10월 7일. 아내가 죽은 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ㅡ From 후배 김형민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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