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고위관계자 본지에 밝혀…
“노무현은 줄담배 피며 잠못자고 권양숙은 만취상태서 잠들었다”.. 권양숙, 비서관이 깨워도 못 일어나… 노무현 시신 안치된 병원에 뒤늦게 도착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의 죽음과 관련한
배경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본지는 그동안 노무현이 자살하던 2009년 5월 23일,
부인 권양숙 여사(이하 권양숙)가 왜 노무현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 뒤늦게 나타났을까 라는 점에 대해 궁금증과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상식적인 계산으로 볼 때 3시간 이상 늦게 도착한 것이다.
이에 본지는 그 동안 노무현 측근들을 상대로 취재를 하면서
노무현이 자살한 시간을 전후한 권양숙의 행적에 대해 물어봤다.
그러나 이 사안에 대해 측근들 대부분은 입을 굳게 닫아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웬일인지 한국 언론에서도 노무현의 자살과 죽음에 대해서만 부각시켰지, 권양숙의 이날 행적에 대해선 별다른 보도를 하지 않았다.
남편이 유고(有故)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권양숙은 뒤늦게 병원에 나타났을까.
이를 두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소문만 갖고 기사를 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노무현은 오전 6시 40분경 사저(私邸)가 위치한 봉하마을의 뒷산으로 경호원 한 명과 함께 산책을 나섰으며 오전 6시 50분경 속칭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뒤늦게 투신한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발견한 경호원은 즉시 인근 김해 세영병원으로 노무현을 긴급후송 했다. 이때가 7시 5분경이었다.
의식을 잃은 노무현은 이 병원에서 5분가량 머물렀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세영병원 측은 자신들 보다 시설이 좋은
부산대병원으로 노무현을 후송했다.
하지만 심한 전신골절을 당한 노무현은 세영병원으로 옮겨질 때부터 소생 가능성이 없었다.
권양숙이 부산대병원에 나타난 것은 노무현이 사망한 지 한참 뒤인 오전 10시 30분께. 일부 언론이나 노무현 측은 이 부분에 대해 권양숙이 오전 9시 25분경 병원에 왔다고애써 도착시간을 축소시켰다.
그러나 본지 확인결과 그녀는 오전 10시 30분경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 도착했으며 노무현의 시신을 확인한 후 혼절했다.
여기서 갖는 의문점은 정상적인 상태의 부인이라면 남편의 투신사실을 보고 받자마자 오전 7시께부터 ‘버선발 차림으로라도’ 승용차나 구급차에 동승했어야 마땅하다.
만약 이때 동행을 못했다면 비서관이나 경호원과 함께 세영병원을 거치지 말고 막 바로 부산대병원행을 택해 최소 오전 8시 30분 이전에는 병원에 도착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권양숙은 10시 30분이 돼서야 초췌한 얼굴로 병원에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노무현이 죽은 후 최소 3시간이 지나서야 자살한 남편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는 엉뚱한데서 풀렸다.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 온 A 씨(전직 뉴욕한인단체장)가 지난 1월 본지에 전화를 걸어 와 한국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던 중 “한국정부 고위층(차관급 이상) B 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던 날의 권양숙 여사 행적과 관련 해 상당부분 알고 있으니 취재를 해 보라”는 제보를 해 왔다.
하지만 본지의 B 씨를 상대로 한 취재는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전화시도와 측근을 통한 접촉 끝에 어렵게 B 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다음은 B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왜 권양숙 여사가 시신이 안치된 부산대 병원에 뒤늦게 나타났나.
▲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먼저 익명을 보장해 줄 수 있나.
--물론이다.
▲ 이것은 기자 대 취재원의 부탁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부탁이다.
--알았다. 약속을 지키겠다. 먼저 당시 상황을 누구한테 들었나.
▲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정확하게 말 할 수 없지만 노 대통령 자살 당시 사저에 근무하던 사람에게 들었다.
--비서관인가. 경호원인가.
▲ 그것은 말 할 수 없다.
--직접 만나 들었나.
▲ 그렇다. 내 측근 C 씨와 함께 들었다.
--당시 노무현 사저에 근무하던 사람은 사건 당시 노무현 부부의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 얘기하던가.
▲ 노 대통령이 자살하기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부부싸움이 있었다.
고성과 욕설이 오갈 정도였다고 한다. 화가 난 노 대통령이 집기까지 집어 던질 정도였단다.
--당시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 말해 줄 수 있나?
▲ 내용은 당사자들의 프라이버시이기 때문에 말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노 대통령이 뇌물수수혐의로 ‘치욕적인’ 검찰수사를 받고,
앞으로 수사망이 권 여사에게로 조여 오는 데에 대한 불만과 서로에 대한 원망이었다.
--고성과 욕설이 오갈 정도였으면 두 사람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했다는 얘기인데.
▲ 그렇다. 권 여사는 만취상태였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소리가 크게 났으면 사저 근무자들이 알았을텐데.
▲ 부부싸움이 워낙 격해 비서관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부부싸움은 언제 끝났나.
▲ 정확한 시간은 알 수가 없지만 새벽녘이 돼서야 끝났다고 한다.
--부부싸움 이후의 상황은.
▲ 노 대통령은 줄담배를 피우며 잠 한숨 못 잤고, 권 여사는 만취상태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 노무현 가족들과 측근들의 비리에 성난 국민들이 노무현에 대한 구속수사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아래는 비리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권 여사와 정상문전 청와대 비서관, 노 대통령 아들 건호 씨- 가족과 측근들의 비리는 결국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부부싸움 직후 유서를 썼다는 얘기인데.
▲ 시간 정황상 그렇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유서를 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 대통령이 투신한 사실을 권 여사에게 언제 알렸나.
▲ 투신사실을 경호원을 통해 전해들은 비서관이 즉시 권 여사에게 알리려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전 7시 전후라는 얘기인데 권 여사의 반응은.
▲ 권 여사가 만취된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인지 비서관이 깨워도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비서관이 깨운 지 얼마 만에 권 여사가 일어났나.
▲ 정확한 시간은 알 수가 없으나 대략 한 시간이상이 지난 후 간신히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권 여사의 반응은.
▲ 넋이 빠진 얼굴이었다고 한다.
--이후의 상황은.
▲ 언론에 보도된 그대로이다. 이게 권 여사가 부산대병원에 뒤늦게 나타난 이유이다.
--결국 그날 밤의 큰 부부싸움이 노 전 대통령을 자살로 이끌고 간 이유 중 하나가 는 셈인가.
▲ 그렇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평생 동고동락한 부인으로부터 모진 소리를 듣고 노 대통령의 심정이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은 위험부담을 안고 왜 이번 취재에 응했나.
▲ 노 대통령 자살사건이후 별의별 루머가 다 떠돌았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에 의한 음모론까지 나왔다. 부부싸움 얘기도 루머에 속해 있었다.
노무현은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역사에 바르게 기록돼야 한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내게 말을 전해 준 사람이나 나나 확실한 신분의 사람이다.
내가 이명박 정부 내 고위층의 한명인데 허튼 소리를 하겠나.
나 역시 개인적으로도 노 대통령 자살 당일의 상황이 궁금했었다.
--당신의 얘기를 같이 들은 C 씨에게 확인해 볼 수 있겠나.
▲ 그렇게 하라.
이후 본지는 C 씨를 서울에서 만나 B 씨의 얘기를 전해주었다.
C 씨는 “모두 사실”이라며 “오히려 B 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 얘기 안 한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C 씨는 “두 사람의 정확한 부부싸움 내용은 알 필요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사실 노무현 부부의 싸움은 자살 사건이전에도 몇 번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문 비서관이 봉하마을을 방문하여 권양숙과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노무현은 부인의 금품수수사실을 알게 된 후 대노했으며 이후 잦은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정부패한 가족과 측근이 “청렴결백만큼은 자신 있다”고 강조한 노무현을 자살로 이끌었다
전직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은 대한민국에 있어 매우 불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국가 신인도까지 떨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같은 사건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선 원인을 밝혀내고
재발방지를 위한 초석을 마련해야만 한다.
먼저 노무현의 죽음은 본인의 잘 못이 제일 크다.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가족관리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 준 점도 있다.
본인이 아무리 청렴결백해도 부인이나 자녀들이 자신 모르게 ‘나쁜 일’을 벌이며 알 길이 없다.
대통령 부인의 문제점을 대통령 면전에 대 놓고 보고 할 만 한 인물이 대한민국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이순자 여사와 처가의 문제점을 지적한
측근들이 줄줄이 청와대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 대통령들은 자식관리에 실패했다.
4.19혁명 직후 자신의 친부모인 이기붕 부통령 부부를 죽이고 자살한 이승만의 양자
이강석을 필두로 마약에 손 대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박정희의 외아들 박지만,
육영재단을 두고 아직도 분쟁에 휘말려 있는 박근혜와 박근령은 모든 이의 눈살을 찌푸리기에 충분하다.
이후 전두환 비자금 조성에 일조한 전재국, ‘소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큰 권력을 행세한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 또한 김대중의 아들들은 어떠한가. 김홍일, 홍업, 홍걸 삼형제는
비자금 조성에 큰 몫을 했으며 그 돈으로 지금도 혜택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노무현의 경우는 아들 건호가 미국에서 호화생활을 하고 2천만 달러가 넘는 골프장을
매입하러 다녀 세상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으며, 딸 정연은 불투명한 방법으로
뉴저지의 고급주택을 사들여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노무현은 결국 본인만 깨끗했지, 측근들이나 가족은 부정과 비리의 중심에 서 있었다.
노무현은 이점을 못 마땅해 하고 분개해 했을 것이다. 비록 인기 없고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청렴결백만큼은 자신 있다고 했지만 결국 그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뇌물수뢰혐의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김해 봉하마을에서
서울 검찰청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취재기자들을 향해 머리숙여 사과하고 있다.
노무현은 측근과 가족이 죽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지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본지가 이런 기사를 게재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바로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터넷을 뒤지면 이명박 음모론, 노무현 타살설 등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본지의 심층 취재결과 그 같은 루머는 그냥 헛소문에 불과하다.
자존심 강한 노무현은 가족과 측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물론 그들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이다.
부부싸움을 하던 권양숙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기도 했을 것이다.
오는 5월 23일은 노무현이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기해 노무현 지지자들이 어떤 발언을 한다 한들 그들은 죄인일 수밖에 없다.
한명숙 전 국민총리가 영결식장에서 “당신을 지키지 못 해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궤변에 불과하다.
노무현 측근들은 “우리의 잘못으로 당신을 죽게 만들어 죄송하다”고 말해야 한다.
노무현의 죽음은 측근들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ㅁ 임종규 뉴스메이커 선임기자/ 최영수 뉴스메이커 서울주재 기자
출처 : 인사이드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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