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과거제도

정윤덕 2013. 1. 1. 18:56

조선시대의 과거 제도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설명하면 정기 시험으로 4년마다 실시하는 식년과,

         비정기 시험으로 나라에 경사(대군 출생, 세자 결혼, 임금 또는 왕비 환갑 등)가

         있을 때 (왕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 후궁이 낳은 아들은 군이라 하고,

                  왕비가 낳은 딸은 공주, 후궁이 낳은 딸은 옹주라 하였다.),

         임시로 실시하는 증과문과 또는 별시문과 와,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하시어 실시하는 알성과가 있는데,

         가장 영광스러운 시험은 알성과에 급제하는 것이었다.

         이를 알성급제 라 했다.

         이렇듯 증과문과, 별시문과, 알성과는 어쩌다 있는 시험이었다.

 

         과거에 급제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각도에서 실시하는 향시나 중앙에서 행하는 초시(1차)를 통과해야

         4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식년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식년과에서는 4년에 한 번씩 생원 100명. 진사 100명을 뽑는데(2차),

         생원과는 경서를 암기하는 시험이고 합격자를 생원이라 하며,

         진사과는 제목과 운자를 정해주면 그에 따라 한시를 짓는데,

         합격자를 진사라 하였다.

 

         생원과. 진사과에 합격한 자에 한하여

         과거의 대과(문과) 초시에 응시할 수가 있고,

         성균관(현재의 서울대)에 입학 자격도 주어졌다.

         문과 초시에는 생원 과 진사 중에서 성균관에서 50명, 한양에서 40명,

         경상도에서 30명, 충청과 전라도에서 각각 25명, 경기에서 20명,

         강원과 평안도에서 각각 15명, 황해와 함경도에서 각각 10명을 선발하여(3차)

         총 240명이 문과 본시에 응시하였다.

 

         대과 본시는 1차 시험을 초장이라고 하여 경서를 암송하고,

         2차 시험을 중장이라 하여 한시를 지었다.(4차)

         대과 본시 응시자는

         초장이나 중장 중 하나를 선택하여 시험을 칠 수 있는데,

         응시자 대부분이 초장과 중장을 다 봤다.

         초장에서 16명, 중장에서 16명, 초장과 중장 합쳐서 1명

         총 33명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성적이 나쁘면 30명, 28명도 뽑았으며 아무리 성적 우수자들이 많아도

         33명 이상은 뽑지 않았다.

 

         일단 급제자 33명이 확정되면,

         장문의 논문을 작성하는 논술시험을 치렀다.(5차)

         이 시험을 殿試(전시: 전각(궁궐) 전, 시험 시)라고 하는데

         임금이 친히 임석하였다.

         시험장에서 제목을 제시 받고 일테면 B4 용지 몇 장 분량의 답안을 작성했다.

 

         殿試(전시)는 지식, 논리적 사고력, 당시의 조정과 사회민심에 대한 시각,

         국가관, 세계관, 선비의 지조와 절개 등등

         응시생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시험이었다. 

         최우수자 3명을 갑과, 그 다음 우수자 7명을 을과,

         나머지 23명을 병과라 하였다.

         최우수자 3명을 각각 장원(1등), 방안(2등), 탐화(3등) 라 하였다.

         조선시대 역사를 말하면서 일테면 율곡 이이, 송강 정철 등의

         장원 급제자의 답안지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게 바로 이 전시 답안지를 뜻한다.

 

         벼슬자리가 많지 않아서 합격자도 일괄적으로 인사발령을 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원 급제자는 종6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즉시 발령을 받았다.

 

         특히 식년과의 생원과, 진사과, 대과 본시의 초장, 중장, 전시에서

         모두 다 장원으로 통과한 사람은 임금이 친히 불러서

         암행어사로 삼았고 승진도 매우 빨랐다.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는 4년에 33명씩을 뽑았으므로

         오늘날의 사법시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과거급제가 어려웠다.

 

         조선시대 선비의 프로필을 보면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4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정기 과거시험으로 官(관)에 입문했으며

         급제한 성적 즉 순위(4등에서 10등 까지) 등급을 의미하는 것이다.

         갑과, 을과, 병과에 따라 官(관)에 입문하면서 맡는 보직에 차이가 있었다.

 

         조선시대 3대가 연이어 장원급제한 가문이 둘이 있다.

         하나는 경주 김씨 계림군(태조 이성계의 개국공신 김균으로 좌찬성 역임)파

         집안으로 김천령은 연산군 1년(1495년) 식년문과에 장원,

         그 아들 김만균은 중종 23년(1528년) 별시문과에 장원,

         그 손자 김경원은 명종 8년(1553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김경원 동생인 김명원도 명종 16년(1561년) 식년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선조 임금 때 좌의정 까지 올랐다.

         추사 김정희(1786-1856, 대사성, 이조참판 역임)도 경주김씨 계림군파 이다.

 

         또 하나의 집안은 여흥 민씨 가문으로 민광훈은 인조 6년(1628년)

         알성문과에 장원, 그 아들 민정중은 인조 27년(1649) 식년문과에 장원,

         그 손자 민진장은 숙종 12년(1686년) 별시문과에 장원을 하였다.

         고종의 왕비 명성왕후가 여흥 민씨 가문이다.

 

         관직에서 이조 정랑(정5품, 정3품 당상관 이하 관직의 인사권자) 이라는 자리는

         (옛 총무처 인사과장 자리와 비슷하지만 파워 면에서는 비교가 안될 만큼 컸다.)

         정6품 이하의 관직에서 경력을 쌓은 과거급제자 중에서

         당대의 최고 엘리트가 맡는 자리이다.

         이조 정랑 출신은 큰 사고가 없는 한 6조 판서의 자리에 올랐고,

         반역죄가 아닌 한 사법처리도 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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