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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5현과 동국18현

정윤덕 2012. 7. 19. 21:44

 

동방5현과 동국 18현


동방의 5현(五賢) → 조선 초~중기 때 학자들, 이이·조식은 포함x

(사림파 계보 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일손)-조광조(+이언적)-이황,이이로 이어짐 참고) 

이황    (1501~1570) 퇴계
조광조 (1482~1519) 정암
이언적 (1491~1553) 회재

정여창 (1450~1504) 일두
김굉필 (1454~1504) 한훤당

 

- 우리나라 유학의 명현 18인 중에서도 조선시대 성리학을 이끈 유학자들을 일컫는다.

 

- 이들 동방 5현에 대한 문묘 종사 문제는 1570년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시작됨 but 사림의 분열과 임진왜란 등의 혼란을 겪으면서 힘을 받지 못하다가, 

-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라가 진정되면서 광해군 때(즉위한 지 3년째 되는 1610년에)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된다


동국 18현(十八賢) 문묘에 배향된 분들

 → 통일신라, 고려 때 인물도 포함, 동방 5현 모두 포함, 이이는 포함되나 조식은 18현에 x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의 시초가 되는 이황, 조식, 이이, 성혼 중 조식만 포함되지 않음) 

 → 김인후 이후로는 서인(이이의 문인, 노론 중심) 학자들 

  - 김장생,조헌[임진왜란 옥천에서 의병, 금산에서 전사] : 이이의 문인

  - 김집 : 김장생의 아들로 아버지와 더불어 예학을 집대성 → 김장생 <가례집람>

  - 송시열, 송준길: 함께 국정주도, 북벌계획 참여

  - 박세채 : 김상헌과 김집의 제자, 숙종 때 탕평론 처음으로 제기

 

홍유휴 설 총  빙월당
문창후 최치원 고운
문성공 안 향 회헌
문충공 정몽주  포은
문경공 김굉필 한훤당
문헌공 정여창  일두
문정공 조광조 정암
문원공 이언적 회재
문순공 이 황  퇴계
문정공 김인후 하서
문성공 이 이 율곡 (1536~1584)  
문간공 성 혼  우계
문원공 김장생 사계 (1548~1631) 
문열공 조 헌 중봉
문경공 김 집 신독재
문정공 송시열 우암
문정공 송준길 동춘당
문순공 박세채  남계(1631~1695 숙종 21)

 

 


http://www.anyroot.com/bohak/dongkuk18.htm
위의 주소로 가시면 동국(東國) 18현의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문묘(文廟)란?


유교(儒敎)의 성인(聖人) 공자(孔子)을 모신 사당(祠堂)을 말한다. 학덕(學德)이 높은 유현(儒賢)의 위패를 공자와 함께 문묘에 모시고 제향(祭享)하는 우리나라 역사속의 인물들 중 18인이다. 문묘(文廟)는 현재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內에 성균관에 모셔져 있다.

 

 

 

홍유후(弘儒侯) 설 총(薛 聰, 650경∼740경)

자(字)는 총지(聰智), 호(號)는 빙월당(氷月堂),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아들, 어머니는 요석궁 공주(瑤石宮公主).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으로 벼슬은 한림(翰林)을 지내고 주로 왕의 정치에 자문 역할을 했다.
유학(儒學)과 문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일찌기 국학(國學)에 들어가 학생들은 가르쳐 유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가 창제한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은 당시 중국 한문의 섭취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이두(吏讀)를 창제했다고 하나 그가 생존하기 전인 진평왕(眞平王 : 579 ∼ 631) 때의 「서동요(薯童謠)」, 선덕여왕(善德女王 : 632 ∼ 647) 때의 「풍요(風謠)」 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왕계(花王戒)」로써 신문왕을 충고한 일화가 전한다.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 857 ∼ ?)


자(字)는 고운(孤雲)·해운(海雲), 시호(諡號)는 문창후(文昌候). 신라(新羅)의 서울 사량부(沙梁部 : 삼국유사에는 본피부라고하며 황룡사 남쪽 미탄사 부근에 있다고 기록함) 출신.
어려서부터 총명·정밀·민첩하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서기 874년(경문왕 14) 한 번 시험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선주율수현위(宣州율水縣慰)의 벼슬에 올랐다.
877년(헌강왕 3) 치적(治績 : 정치적으로 남긴 공적)으로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承務郞侍御使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 : 금으로 장식되어 허리에 차던 장신구)를 하사(下賜)받았다. 879년(헌강왕 5) 당(唐)나라 반적의 우두머리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高변 : 당나라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抄)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헌강왕 11) 돌아와서 시독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지서서감(知瑞書監)의 벼슬을 받고 당(唐)나라에서 지었던「계원필경(桂苑筆耕)」과「중산복궤집(中山覆궤集)」 및 시부(詩賦) 3권을 헌강왕(憲康王)에게 올렸다.
이때 조정(朝廷)의 기강이 어지러움으로, 문란한 국정을 개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自請)하여 태산(전북 태인)·부성(충남 서산) 등 태수(太守)를 지냈다. 894년(진성여왕 8) 나라가 혼란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므로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 시정의 수습책)을 상소하여 아찬(阿찬 : 신라 17관등 중 여섯째 관직)의 벼슬을 받았다. 국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당나라에 가서 익힌 학문과 도학은 때를 만나지 못해 마음껏 펴 보지 못함을 개탄하며 벼슬을 사양하고, 산과 강(江)과 해변에 누각과 정자(亭子)를 짓고 송죽(松竹)을 벗삼아 학문에 심취하며 풍월(風月)을 읊조리며 유랑하다가, 896년(진성여왕 10) 가족(家族)을 거느리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동복(冬服) 형 현준(賢俊) 및 정현(定玄) 스님과 도(道)로 우정을 나누다가 여생을 마쳤다.
1020년(고려 현종 11) 8월 내사령(內史令)에 증직,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문성공(文成公) 안 향(安 珦, 1243∼1306)


초명은 유(裕), 자(字)는 사온(士蘊), 호(號)는 회헌(晦軒),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판도판서(版圖判書) 부(孚)의 아들, 1260년(원종 1) 문과(文科)에 급제,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1270년(원종 11)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 문중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했고, 판도 좌랑(版圖佐郞)·전중시어사(殿中寺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충렬왕 14) 우사의(右司議)가 되고 좌승지(左承旨)·정동행성 원외랑(征東行省員外郞)을 거쳐 고려 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왕과 공주를 호종, 원나라에 들어가「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껴쓰고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했다.
1294년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서 동남도 병마사(東南道兵馬使)가 되어 합포진(合浦鎭)에 부임했고, 이어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1296년 삼사 좌사(三司左使)·첨의 참리(僉議參里) 세자이보(世子貳保)를 역임했다.
1298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 관제를 개혁하자 동경유수(東京留守)·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계림부윤(鷄林府尹)·수문전 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고, 이해 태상왕(太上王)이 된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충렬왕이 복위한 이듬해 수국사(水國史),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었다. 한편 문교(文敎)의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했으며, 국학 대성전(國學大成殿)을 삭성하여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악기(樂器)와, 육경(六經)·제자(諸子)· 사(史) 등의 서적을 구입했다.
이로써 유학이 크게 떨치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로 지칭된다.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했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단(長湍)의 임강성원(臨江書院), 곡성(谷城)의 회헌영당(晦軒影堂), 순흥(順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1337∼1392)

초명(初名)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字)는 달가(達可), 호(號) 는 포은(圃隱).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운관(云瓘)의 아들. 영천(永川) 출신.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한 뒤 1360년 문과(文科)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修撰) 등을 거쳐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侯)·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한 후 이해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족(女眞族)의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 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 정랑(禮曹正郞) 겸 성균박사(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 등을 역임하고, 1371년 태상 소경(太常少卿)·보문각 응교(寶文閣應敎) 겸 성균직강(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 나와 사신으로 큐우슈우(九州)의 지방장관 이마가와(今川子俊)에게 가서 왜구(倭寇)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379년 전공 판서(典工判書)·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 예의 판서(禮儀判書)·예문관 제학(禮文館提學)·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전하고, 이어 밀직제학·보문각 제학·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1381년 성근익찬공신(誠謹翊贊功臣)에 봉해지고, 1383년 동북면 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對明) 국교를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1388년 삼사 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지서연사(知書筵事), 이듬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하고, 13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문하시중(門下侍中)·판도병의사사(判都兵議司事)·병조상서시사(兵曹尙書侍事)·영경령전사(領景靈殿事)·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 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 가서 조 준(趙 浚)·남 은(南 誾)·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중,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 : 태종)이 이성계를 그날 밤으로 개성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방원의 문객(門客)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擊殺)되었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었으며,「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鄕校)를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꺾였다.
시문(詩文)에 능하며 시조「단심가(丹心歌)」이외에 많은 한시(漢詩)가 전하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중종(中宗)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개성(開城)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시호는 문경(文敬), 유(紐)의 아들. 1480년(성종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1494년(성종 25) 남부 참봉(南部參奉)이 되고, 이어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감찰(監察) 등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 일파로 몰려 회천에 유배,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사(賜死)되었다.
평소 육경 연구에 전심, 성리학(性理學)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 등 학자들이 배출 되었고 그림에도 능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자(字)는 백욱(伯욱), 호(號)는 일두(一두),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함길도 병마우후(咸吉道兵馬虞侯) 육을(六乙)의 아들. 함양(咸陽) 출신.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 되고, 한동안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 오경(五經)과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다.
1483년(성종 1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이 되고, 1490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이 되었다. 이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안은 현감(安陰縣監)을 지내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종성(鍾城)에 유배, 죽은 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가 되었다.
당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서 경사 (經史)에 통달하고 역행실천(力行實踐)을 위한 독서를 주로 했다.「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진수잡저(進修雜箸)」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모두 소각(燒却), 지금의 정 구(鄭 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속에 그 유집(遺集)이 전할 뿐이다.
중종(中宗) 때 우의정에 추증(追贈), 광해군(光海君) 때에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나주(羅州)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咸陽)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합천(陜川)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居昌)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鍾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諡號)는 문정(文政), 감찰(監察) 원강(元綱)의 아들, 14세 때 어천도 찰방(魚川道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희천(熙川)에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修學), 이때부터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1510년(중종 5) 진사(進士)가 되고, 1515년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全的)·감찰(監察)을 역임하며 왕의 신임을 얻고, 입시(入侍)할 때마다 유교(儒敎)로써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해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역설했다.
이해 정언(正言)으로서,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계비 책봉 문제가 논의될 때 박 상(朴 祥)·김 정(金 淨) 등이 앞서 폐위된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다 대사간(大司諫) 이 행(李 荇)의 탄핵으로 유배되자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言路)를 막는 결과가 되어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다고 주장, 오히려 이 행(李 荇)을 파직케 함으로써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을 입증 받았다.
그후 수찬(修撰)에 이어, 호조(戶曹)·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1517년 교리(校理)로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 향촌(鄕村)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呂氏 鄕約)을 8도에 실시케 하였다.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없애게 했다.
1519년 대사헌(大司憲)에 승진,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했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자기 일파의 신진사류(新進士類)인 소장학자를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勳舊派)를 외직에 몰아내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훈구파의 결정적 반발을 야기했다.
훈구파의 홍경주(洪景舟)·남 곤(南 袞)·심 정(沈 貞) 등은 경빈(敬嬪) 박씨(朴氏)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게 하고,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다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는 한편,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만나서 위협에 가까운 논조(論調)로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무고했다.
이에 조광조의 도학적(道學的)인 언행에 염증을 느껴 오던 왕은 그를 투옥, 영의정(領議政)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일단 사형이 면제되었으나, 능주(綾州)에 유배, 훈구파의 끈덕진 공격으로 마침내 사사(賜死)되었다.
선조(宣祖) 초 신원(伸寃)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능주(綾州)의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洋酒)의 도봉서원(道峰書院), 희천(熙川)의 양현사(兩賢祠)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자(字)는 복고(復古), 호(號)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시호(諡號)는 문원(文元), 생원(生員) 번(蕃)이 아들. 1514년(중종 9) 생원(生員)으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설서(說書)·이조 정랑(吏曹正郞)·장령(掌令)·밀양 부사(密陽府使)·사간(司諫)·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교리(校理)·응교(應敎) 등을 거쳐 1539년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어 선정(善政)으로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고, 당시의 재변(災變)에 대해 올린 대책문이 뛰어나서 병조 참판(兵曹參判)·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올랐다.
그후 부제학(副提學), 이조(吏曹)·예조(禮曹) 및 형조(刑曹)의 판서(判書),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고 1545년(인종 1) 인종이 죽자 좌찬성(左贊成)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國事)를 관장했고, 명종이 즉위하자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올랐으나 사직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서 이 황(李 滉)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유배생활6년동안「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속혹문(續或問)」·「구인록(求人錄)」을 저술했으며 글시를 잘 썼다.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배향되고 있다.


문순공(文純公) 이 황(李 滉, 1501∼1570)


초명은 서홍(瑞鴻), 자(字)는 경호(景浩), 초자(字)는 계호(季浩), 호(號)는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號)는 문순(文純), 진사 식(埴)의 아들. 예안(禮安) 출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정자(副正字)·박사(博士)·전적(典籍)·호조 좌랑(戶曹佐郞) 등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1542년 충청도 암행어사(忠淸道暗行御史)가 되고, 이어 문학(文學)·장령(掌令) 등을 지낸 뒤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그후 사복시정(司僕寺正)·응교(應敎)를 거쳐 단양(丹陽)과 풍기(豊基)의 군수(郡守)를 지내고 1554년 형조(刑曹)와 병조(兵曹)의 참의(參議)에 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으며, 그후 부제학(副提學)·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1566년(명종 21)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어 예조 판서(禮曹判書), 1568년(선조 1) 우찬성(右贊成)을 거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다음해 고향에 은퇴했다.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集大成)한 대유학자로 이 이(李 珥)와 함께 유학계(儒學界)의 쌍벽을 이루었으며,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하여 후진 양성과 학문의 연구에 전심, 끝까지 학자적 태도에만 철저했다. 시문(詩文)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고 겸허(謙虛)한 성격의 대학자로서 중종(中宗)·명종(明宗)·선조(宣祖)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문묘(文廟) 및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槐山)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禮安)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 전국의 수십개 서원(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 시호는 문정(文正).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 황(李 滉)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에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임을 맡았다.
특히,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해에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일년도 채 못되어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갔다.
그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여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사이에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여, 인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성경(誠敬)을 주안으로 하였기 때문에 노수신(盧守愼)과 더불어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것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면서,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하여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여, 이른바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으며,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문성공(文成公) 이 이(李 珥, 1536∼1584)


아명은 현룡(見龍), 자(字)는 숙헌(叔獻), 호(號)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찰방(察訪)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강릉(江陵) 출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 초시(進士初試)에 합격, 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서(佛書)를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儒學)에 전심하여 23세 때 이 황(李 滉)을 찾아가 만났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生員試)·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초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副敎理)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병으로 사퇴했다.
그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 율곡(栗谷)과 석담(石潭)에서 학문연구에 전심하다가 1581년 다시 불려 대사헌·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의 판서(判書), 우참찬(右參贊)을 역임, 1583년 당쟁(黨爭)을 조장한다는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가, 같은 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등용,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조정을 위해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조선 유학계에 이 황(李 滉)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장구(章句)의 분석적 해설보다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함을 학문을 연구하는 태도로 했으며, 이 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說)을 근본사상으로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 이 사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학문을 민생문제와 직결시켰고, 당쟁의 조정, 10만 군대의 양성(養成) 및 대동법(大同法)과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조자앙(趙子昻)의 체를 습득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선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문간공(文簡公) 성 혼(成 渾, 1535∼1598)

자(字)는 호원(浩原), 호(號)는 우계(牛溪)·묵암(默庵),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수침(守琛)의 아들. 17세 때 감시(監試) 초시(初試)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복시(覆試)를 못치르자 과거(科擧)를 단념, 백인걸(白仁傑) 문하에서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했다. 선조(宣祖) 초에 학행으로 참봉(參奉)·현감(縣監)·지평(持平) 등에 계속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580년에는 장령(掌令) 직을 굳이 거절하고 마교(馬轎)를 타고 상경하라는 우례(優禮)까지 받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右參贊)에 오르고 1594년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러 영의정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 파주(坡州)로 돌아갔다. 일찍부터 이 이(李 珥)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이 황(李 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지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주장하는 이 이와 1572년(선조5) 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이 이의 학설을 반박, 유학계(儒學界)의 큰 화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이 이의 문인인 조 헌(趙 憲)·한 교(韓 嶠)·황 신(黃 愼)·이 귀(李 貴)·정 엽(鄭 曄) 등이 그의 문인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죽은 뒤 반대파들에 의해 한때 관작(官爵)을 추탈당했다가 인조 초에 복관(復官),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海州)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咸興)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坡州)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 대사헌 계휘(繼煇)의 아들. 송익필(宋翼弼)·이 이(李 珥)의 문인.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창릉 참봉(昌陵參奉)·순릉 참봉(順陵參奉) 등을 거쳐 동몽교관(童蒙敎官)·정산 현감(定山縣監)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장령(掌令)·사업(司業)·상의원정(尙衣院正) 등을 거쳐 이듬해 집의(執義)·공조 참의(工曹參議)·부호군(副護軍)을 지냈고, 1625년(인조 3)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付事)가 되었다.
이 이(李 珥)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으며,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 조선 예학(朝鮮禮學)의 태두가 되었고, 문하에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유학자를 배출, 서인(西人)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룩했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열공(文烈公) 조 헌(趙 憲, 1544∼1592)

자(字)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諡號)는 문렬(文烈), 응지(應祉)의 아들,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의 문인.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정주 교수(定州敎授)를 거쳐 1572년(선조 5) 교서관 정자(校書관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다 삭직(削職), 곧 저작(著作)에 등용되고,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호조와 예조의 좌랑(佐郞), 감찰(監察)을 역임하고, 통진 현감(通津縣監)이 되어 죄인을 엄중히 다스려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기용,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종묘서령(宗廟署令)을 지내고, 1582년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보은 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 학제 개편(學制改編)으로 전국에 제독관(提督官)을 둘 때 공주(公州) 제독관에 임명되어, 당시 정권을 잡은 동인(東人)이 이 이·성 혼 등을 추죄(追罪)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고 고향에 돌아간 사실로 인해 직장(職場)을 이탈했다는 죄로 파직당했다.
1589년 동인의 전횡(專橫)을 공격하는 소(疏)를 올렸다가 길주(吉州)에 유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용서받았다. 1591년 일본 사신이 오자 옥천(沃川)에서 상경, 대궐 앞에서 일본 사신의 처단을 상고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 국방력의 강화를 주장했으나 용납되지 않았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천 7백여명 을 규합, 이해 8월 영규(靈圭) 등 승병(僧兵)과 합세하여 청주(淸州) 를 수복했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까와(小早川陸景)의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戰功)을 시기하는 관군(官軍)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이 해산당하고 불과 7백명의 의병으로 금산 전투에 참가, 끝까지 용전하다 7백 의병과 함께 모두 전사했다.
이 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사람으로「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지지하여 이 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문경공(文敬公) 김 집(金 集, 1574∼1656)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文敬), 장생(長生)의 아들. 1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부여 현감(扶餘縣監)으로 등용, 예조 참판(禮曹參判)·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을 계획했으며, 후에 대사헌·좌찬성(左贊成)·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학문을 계승,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예학(禮學)의 체계를 세웠다.
1883년(고종 20)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와 효종묘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愼獨齋文集)」·「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 등이 있다.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아명(兒名)은 성뢰(聖賚), 자(字)는 영보(英甫), 호(號)는 우암(尤庵),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갑조(甲祚)의 아들.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의 문인.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 천거로 경릉 참봉(敬陵參奉)이 되었다.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고,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 1637년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낙향, 후에 용담 현령(龍潭縣令)·지평(持平)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649년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 중에서도 청서파(淸西派)에 속했던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領議政)으로 발탁되자 사직하고 낙향, 이듬해 김자점(金自點)이 파직된 후 진선(進善)에 재임되었다. 1651년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淸)나라 연호(年號)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金自點)이 청(淸)나라에 밀고하여 사신(使臣)의 압력에 못이겨 사직하고 낙향, 송준길(宋浚吉)과 서적 편찬 및 후진양성에 전심했다. 1658년(효종 9) 찬선(贊善)에 등용,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추진 중 이듬해 효종이 죽자 북벌계획은 중지되었다. 이때 효종(孝宗)의 장례(葬禮)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는 남인(南人)에 대하여 기년설(朞年說)을 건의하여 이를 채택케 함으로써 남인(南人)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는 동안 서인(西人)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1668년(현종 9)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 1671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가 논의되자,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됨으로써 실각되어 제1차 복상 문제(服喪問題) 때 기년설(朞年說)을 채택케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에 유배(流配)되고 웅천(熊川)을 거쳐 1679년(숙종 5) 거제(巨濟)에 이배(移配), 이듬해 청풍(淸風)에 옮겨졌다. 이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기용되어 1683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가 논의될 때 과격한 방법으로 숙청을 꾀하던 김석주(金錫胄)의 태도를 옹호하여 소장파의 비난을 받던 중, 그의 제자인 윤 증(尹 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윤증(尹拯) 등 서인의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領袖)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분파(分派)되었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華陽洞)에 은거, 1689년 왕세자(王世子 : 경종)가 책봉(冊封)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했다가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상경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고, 1694년(숙종 20) 신원(伸寃) 되었다.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자(字)는 명보(明甫), 호(號)는 동춘당(同春堂),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이창(爾昌)의 아들. 어려서 이 이(李 珥) 문하에서 공부하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進士)가 된 뒤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학문(學問)을 닦았다.
1649년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집의(執義)로 기용되어 왕(王)과 함께 북벌(北伐)계획을 적극 추진했고, 뒤에 이조 참의(吏曹參議) 겸 찬선(贊善) 등 여러 벼슬에 기용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1658년(효종 9) 찬선(贊善)에서 물러나 낙향(落鄕), 학문(學問) 연구에 진력했고 뒤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659년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현종(顯宗)이 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남 인(南 人) 윤 휴·윤선도 등의 3년(만 2년)제를 반대하여 기년제(朞年制 : 만 1년)를 주장, 논란을 거듭하던 끝에 승리하여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나 곧 사퇴했다.
1665년 원자 보양(元子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輔養官)이 되었으나 기년제(朞年制)의 잘못으로 남인(南人)들의 규탄과 거듭되는 상소로 사퇴했고, 뒤에 좌참찬(左參贊) 겸 좨주(祭酒)·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학통(學統)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고, 이이(李珥)의 학설을 따랐다. 문장(文章)과 필법(筆法)에도 능(能)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공주(公州)의 충현서원(忠顯書院), 옥천(沃川)의 표충사(表忠祠), 대전(大田)의 숭현서원(崇顯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著書)로는「동춘당집(同春堂集)」·「어록선(語錄選)」외 많은 작품을 남겼다.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시호는 문순(文純), 교리(校理) 의(의)의 아들. 한성(漢城) 출신. 김상헌(金尙憲) 문하에서 주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고 송시열(宋時烈)과도 학문 교류를 했다. 28세에 천거로써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거쳐 집의(執義)·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고, 1694년(숙종 20)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한 유학자(儒學者)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많은 저술 외에 70여건의 문집(文集), 논어·맹자의 찬요(簒要), 시(詩)에 관한 요의(要義), 신라·고려·조선에 이르는 유현(儒賢)들의 사우연원(師友淵源)을 수록한 책 등, 모두 후진들에게 귀중한 문헌을 남겼으며 글씨를 잘 썼다. 문묘(文廟)와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대표적 저술로는 「범학전편(範學全編)」·「시경요의(詩經要義)」·「춘추보편」·「남계독서기」·「대학보유변(大學補遺辨)」·「심경요해(心經要解)」·「학법총설(學法總說)」·「양명학변」·「남계수필록(南溪隨筆錄)」·「심학지결」·「신수자경편」·「육례의집」·「삼례의(三禮儀)」·「사례변절(四禮變節)」·「가례요해(家禮要解)」·「가례외편(家禮外編)」·「남계예설(南溪禮說)」·「남계시무만언봉사(南溪時務萬言封事)」·「남계연중강계(南溪筵中講啓)」·「남계기문(南溪記聞)」·「동유사우록」·「주자대전습유(朱子大全拾遺)」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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